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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8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3

독서생활

by 캐뤼 2019. 3. 28.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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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0~82쪽까지 읽었다.

의외로 속도가 빠르다.

사실 프롬이 말하는 성숙한 사랑, 즉 실존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해하면 그 이후의 내용들은 미시적인 접근이라 상대적으로 쉽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을 말한다. 내면적 자유와 독립의 상태.

성숙한 사랑은 주는 사랑이다. 주는 것은 능동적인 행동이다. 내가 가진 잠재능력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준다는 행위를 통해 나의 부, 나의 힘,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즐겁게 경험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줄까?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자기 자신 즉 생명을 준다.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을 주는 것이다. 내 기쁨, 관심, 이해, 지식, 유머, 슬픔 등 내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주는 것이다. 내 생명을 나눔으로써 상대를 고양시키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된다. 그리고 진실로 준다면 그 생명은 되돌아온다. 

준다는 것은 상대는 주는 사람이 되게 하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에는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사랑에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책임을 지기로 결정하고, 항상 응답할 준비가 되었다.

사랑에는 존경이 포함되어 있다. 존경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특성을 아는 능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와 일체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관심에 의해 상대를 보고 알게된 상대에 대한 지식에 바탕을 둔 보호와 책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지식은 인간의 내면적 핵심으로 파고들어, 나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상대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상대를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생각으로 얻는 지식이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한 지식만이 살아있는 지식이다.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답한다.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이다.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어제의 내용 복습.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 한번 더 정리가 필요했다.

(외부의 실재는 내적 상태를 실망시키든가 만족시킬때만 의미가 있다. 현실적인 것은 내부에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욕구라는 관점에서만 현실적이다.)

그리고 나서 부모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나는 수동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뿐이다. 어머니에 의한 무조건적인 사랑이기에 보답할 필요도 없지만, 만들어낼 수도 획득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후 자신의 행위로 사랑을 만들려는 감정적 요인이 생긴다. 무엇이든 주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받는 것에서 사랑으로, 창조적인 사랑으로 변하고 성인이 되면 (타인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자기본위성을 극복한다.

다른 사람의 욕구가 중요해지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즐거워진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진다. 사랑함으로써 자아도취와 자기본위 상태에 의한 고독에서 벗어나 합일감, 참여감, 일체감을 느낀다. 스스로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만들어내는 잠재력을 느낀다. 

미숙한 사랑은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미숙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하다.

어머니의 사랑이 자연계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계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상, 질서, 훈련,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한다. 아버지는 아이를 가르쳐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지시해준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며 복종이 주요한 덕목이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노력하고 통제할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가 독립해서 어머니에게서 떨어져나가기를 바라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이가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떤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내 사랑, 네 사람과 행복에 대한 내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그 결과를 받아을어야하고 내 마음에 들기 위해 네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서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자신의 사랑의 능력이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하는 것이다.

 

사랑은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을 말한다.
어떤 이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활동이고 영혼의 힘이므로 대상을 찾아낸다고 해서 저절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픈 대상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형태는 '형제애'다. 형제애에는 사랑의 기본적 요소, 책임, 보호, 존경,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이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핵심으로 파고 들면 우리는 동일성을 발견하고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목적에 이바지 하지 않는 사랑에 있어서만 사랑은 펼쳐진다. 무력한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형제애를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약하고 위태로운 자기자신을 사랑한다. 

 모성애는 생명유지와 성장에 절대로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다. 생명유지 뿐만 아니라 태어난 것이 좋은 일이라고 느끼게 해준다. 살고자 하는 소망 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길러준다. 보호와 긍정적 측면(젖)과 삶에 대한 사랑, 살아있다는 행복감(끌)이 있다. 꿀을 주려면 어머니는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며 엄마로부터 분리되길 바라는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가 실존에 뿌리박고 참으로 사랑하고 주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야 아이의 분리과정에서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될수 있다.

성애가 사랑이라면, 나는 내 존재의 본질로부터 사랑하고 있고, 상대의 존재의 본지에서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 사랑은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 사랑은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성애는 내 자신을 오직 한 사람과 융합한다는 면에서 생명의 모든 면에 있어서 완전한 위임이라는 의미에서만 배타적일 뿐, 인간은 성애를 통해서 전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
성애를 통해 상대방에 대해 더욱 깊이있는 경험을 한다면, 즉 그의 퍼스낼리티의 무한성을 경험한다면, 상대는 결코 익숙해질 일이 없으며, 매일 새롭고,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은 매일 일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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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의 사랑은 내게 한마디로 요약된다.

"상대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주는 행위"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음에 있어 잊기 쉬운 명제.

고양이를 키우면서 내가 가진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인간과 고양이를 다르게 대하는 내 자신을 보는 것은.
인간에게서 쉽게 상처를 받았던 내 자신이 고양이에게서 상처를 받다 차츰 고양이를 이해하면서 상처가 줄어들었다. 그만큼 자존감이 낮았던 거지. 고양이에게서 사랑을 받으려 했다는 것은. 아무튼 고양이의 태도를 매정하다 느끼는 건 내 판단일 뿐 고양이는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주입하자 고양이에게서 상처받는 것은 줄었다. 지금은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서는 지속적으로 상처를 받는 판단을 하게 될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부족해서였다.

나는 딸로 태어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항상 조건이 따라붙었다. 아들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래서 나는 나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내 존재 자체로는 사랑받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다른 조건을 걸어두고 그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의 나는 사랑받기에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좋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행복해지지 않는다. 내 스스로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면, '니가 뭐가 부족하냐며.. 너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이런 얘기들을 한다. 그 말들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존재 자체로 날 사랑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지금의 날 사랑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내 얼굴은 어딘가 슬픈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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