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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말하는대로

Carrie Feels

by 캐뤼 2019. 2. 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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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극배우고 말하는 것을 가르친다.

정확히는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말하기 전 목소리 상태, 말하기에 임하는 자세 등의 기본 바탕을 가르친다. 

개인적으로는 '말하기 밑천'이라고 부른다.

말의 내용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 이전에 이 말에 진심이 담겨 있어야 듣는 사람의 몸에 흡수된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말하는 내내 밑천이 되어줄 것들을 익히는 것이 말을 더 잘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른이 넘어 연극판에 넘어왔다.

운이 좋게도 늦게 연극판에 뛰어든 연극 무지랭이인 나는 '무대위에서 말하는 것'에 일생을 바친 선생님들과 계속 작업해왔다. 

소리도 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반벙어리에게 선생님들은 여러 방법으로 말하기를 알려주셨다. 

욕도 하고, 화도 내고, 당신의 말을 복사하게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고, 사전찾기 문장 나누기부터 가르치기도 하고..


나는 매일 바쁘게 다녔다.

연극을 하고 3~4년은 하루도 집에서 쉰 날이 없었다.

늦게 시작했고 그 전엔 연극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알고자 하는 욕심이 강했다. 

내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으려 거의 매일 공연을 보러 다녔고

연극과 관련한 워크샵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다.

특히 목소리와 움직임과 관련된 워크샵은 다른 스케줄이 없는 이상 필참이었다.


그렇게 2년째 접어드니 말하는 게 무언지 귀에 들어오긴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잘못 말하는지는 들려도 달리 고쳐지지 않았다.

스스로 말은 못하는데 귀는 뚫려서 드라마나 다른 연극을 보기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공연을 보면 말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우습게도 그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더라.

나라면 저 상황에 저 마음으로 저 말을 어떻게 할지 속으로 되뇌이고 되뇌이며 공연을 봤다.


5년째 어느날, 연습 중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놀 때는 되는데 왜 연습하면 말이 안되지?"라는 주제로 서로 이얘기 저얘기 주고 받다가 

갑자기 내 입에서 뱉어진 한 마디에 무언가를 느끼고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과는 다른 내 의견을 던졌었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그 순간 느껴지던 에너지가 기억난다.

그동안 내가 말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

그렇게 1~2분 정도를 말하는데 등 뒤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치 내 몸이 화산이 되어 땀구멍에 있던 수분이 순식간에 화해버리는 느낌 같았다. 

머리에 땀이 맺히기 시작할 무렵 말하기를 마쳤다.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관자놀이에 피가 공급되는 것까지 느껴졌다. 

온몸에서 식은 땀이 분출되고 열기는 물기가 되었으나 내 안에 남은 흥분은 가시질 않았다.

'이거다! 이제야 말을 했다!'

그걸 깨닫고 나자 지금까지 나는 무대에서 허언증환자였다는 것을 알게됐다. 미칠듯 부끄러웠지만 연극은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내 깨달음이 헛된 건 아니었는지 공연이 끝나고 쌤이 한마디 하셨다.


"오늘 잘 했지. 나잇값 했지."


허허허. 마흔 다 되어 말문이 트이도다~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느꼈다. 이제야 알았다.

에너지. 무의식의 근원. 원시적인 생명.

의미와 생명을 담지 않고 글자를 나열하는 것은 껍데기일 뿐이다.


의미와 생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왜 말하는지, 무엇이 내게 그 말을 하게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내 밑바닥 충동에 의해 소리가 나오고 울림이 느껴질 때 그 말은 생명을 갖는다.

우주를 뒤흔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어떤 힘으로 되돌아올까.


아마도 노래 그대로..

말하는대로~ 생각한대로~ 


경험해 본 사람은 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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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전 글을 다 써놓고 취소를 눌러버려 심히 허탈하지만.. 그나마 내용이 아직 무의식으로 도망가지 않았을 때 조금이라도 잡으려고 다시 써본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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