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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0 Improv 즉흥적으로 사는 삶

Carrie Feels

by 캐뤼 2019. 3. 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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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에 몇 안되는 Improv (임프라브) 전문 배우다. FAvengers 라는 대한민국 유일의 임프라브 공연팀의 멤버다. 

Improv는 영미나 유럽 등지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공연형식이다. 공연에 몇가지 룰을 정해놓고 아무 주제도 배역도 상황도 없이 공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즉흥극 쯤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즉흥극이라고 하면 (연기하는 사람들은) 흔히 학교 다닐 때 잠시 해본 상황극 정도를 떠올리며 별 거 아니라 생각하고 비웃는다. 알지 못하면서 비웃는 건 모르는 자의 특권인 듯 하다.

Improv는 배우들이 따라가야 할 스토리라인이 없다. 내가 1초 후에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할지,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다. 서로 움직임을 약속하고 대사를 주고 받는 데 익숙한 배우들은 이미 그 상황에서 멘붕에 빠진다. 내가 사건을 일으킬 의도로 움직였는데 다른 배우에 의해 다른 상황이 펼쳐지면 그 순간부터는 생각이 정지된다. 머리속이 하얘지고 동작이 굼떠진다. 그리고 폭망한 공연속에 허무하게 무너진 자존심을 발견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상황이 올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알아야 움직이겠는데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돼야 말을 할 수 있는데 상황은 언제나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자 욕심을 부려도 상대의 진행을 막아도 공연은 안드로메다로 간다."


나는 연극을 늦게 시작했다. 연극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오다 우연히 30대 중반에 연극이란 것을 접했다. 그때 사람들의 평가는 '연극에 맞지 않는다', '넌 조직생활이 뭔지 모른다', '다 늙은 나이에 시작해서 여자배우가 할 게 뭐 있는 줄 아냐', '니가 이쁘기나 하니, 말을 잘하니, 몸을 잘 쓰니, 몸매가 좋기나 하니', '너처럼 재미로 연극하는 애들은 주위에 피해만 준다' 등등이었다. 하나하나 반박할 수는 있었지만 짬밥이 부족해서 참았다. 내가 할 말은 하나 뿐이었다.

'니들은 연극한다고 흉내는 내는데 사람에 대해 고민한 적은 없구나.'

껍데기로만 평가받고 껍데기로만 있으면서 본질을 표현하겠다고 하는 것이 우스웠다.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더 한 듯 하다. 연기에 대해서는 고민을 많이 했겠지. 그런데 연극의 소재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고민이 없다. 그러니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지. 자가당착임을 모르는 인간들이 하는 말은 나를 스쳐 지나가 허공으로 날아갈 뿐이다. 

아무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는데, 나는 절이 떠나라고 해서 떠났다. 살면서 하는 큰 오해 중 하나가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상황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연극을 하기 전에 너무도 다른 세상들을 겪어왔고 각각의 세상에서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왔기에, 연극판도 당연히 여러개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쉬는 날에는 온갖 워크샵을 찾아다녔고 연극 외에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배웠다. 주말에도 쉰 적이 없었다. 출근 시간에 집을 나와 춘천까지 가서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퇴근시간이 훌쩍 넘어서 집에 오고 다음날 다시 춘천에 가는 강행군을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에 홀렸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닥치는대로 배우고 눈에 띄는 대로 찾아다녔다. 

그렇게 흘러흘러 만난 것이 지금의 한국즉흥극장이다. 그리고 즉흥극장에서 1년여를 부딪히며 팀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찾은 결과 지금의 FAvengers가 만들어졌고 매달 공연을 하는 정도가 되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시작이 반이니까, 뭐.


FAvengers 이전에도 임프라브 공연을 했었다. 우연히 소개받아 멋모르고 했었는데 매일매일이 나와의 싸움이었다. 아무런 특징도 없고 연극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내게는 너무 생소한 훈련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울 정도로 나는 표현을 참 못하는 사람이었다. 공부나 하며 앉아 있으면서 괜찮은 척 하는 삶을 살았으니 감정을 제어하고 표현하지 않는 데 익숙할 수 밖에. 

나는 고시생들 중에서도 예측불가능한 튀는 사람이었지만 표현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는 선비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하려는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쓰였다. 신경쓰이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하는 것이 잘했다고 평가받을까 아닐까.

범생이로 살았던 내게는 남들의 평가가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멋있어보이고 싶고, 예뻐보이고 싶고, 그럴싸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내려놓지 못했다. 거듭되는 공연은 내게 평가받는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

아무튼.

지난 5년간 Improv를 해본 결과, Improv는 평생을 경쟁에 치여사는 사람에게 자유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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